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1-04-18 10: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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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농막(農幕)이었다. 감귤창고로 쓰였단다. 설마 거기에 15세기 프레스코화(fresco)가 걸려있을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수태고지>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창고로 들어선다. 사방이 깜깜하다. 한 쪽 벽면에 큰 구멍 하나가 뚫려있다. 시선은 오롯이 빛을 향한다. 불이 켜지고 나서야 묻게 된다. 도대체 뭐지? ‘죽음과 탄생’, ‘무덤과 자궁의 한 묶음이라니. 창 너머 무덤을 끌어 들여 <수태고지>와 대비시킨 절묘한 배치에 탄성을 내지른다. 재흥이 형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형도 알고 있었을 거다. 무덤(tomb)과 자궁(womb)이 글자 한 자 차이라는 것을! 나는 이 지독한 형용모순(oxymoron)에 온 몸을 떤다.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린다. 거기 한 여인의 울음이 있다. 검은 실루엣은 슬픔이다. 어느새 나의 자화상과 겹치고 있다. 이번엔 내가 울고 있다. 눈물이 빗물이 되고 빗물이 눈물 되어 흘러내린다. 하염없다. 10여분 쯤 지나 그 여인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 1632~1675)의 원작을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Leenam Lee) 작가가 재구성했다. 나는 간음한 여인을 본다. 아니 사마리아 여인이 있다. 뭐라고 해도 좋다. 그건 작가가 독자에게 맡겨둔 상상력의 과제일 터. 눈물 한 방울과 진주 귀걸이가 대비된다.

애벌레가 번데기로 태어난다. 번데기는 다시 나비로 탄생한다. ‘상처 입은 피해자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로 끝내 치유 받은 치유자로 거듭남이 그려지고 있다. 눈물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벌레(유충)와 같은 나도 나비(성충)가 될 날이 있을 것인가? 나도 모를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펄럭이는 나비 한 마리가 나를 응원하고 있다.

이번에는 투박하고 거친 테이블이 시선을 끈다. 제주도의 현무암이다. 크고 작은 구멍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 현무암으로 <최후의 만찬>을 그려낸 재흥이 형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내 눈에는 소통(疏通)이 그려지고 있었다. 교회의 불통을 향한 경고였다. 최후의 만찬석에 앉아 내가 언젠가 갖게 될 내 인생의 엔딩파티를 떠올려본다. 열 두명을 초대해야 한다면 누가 나와 함께 할까? 나에게도 도망친 베드로가 있다. 끝끝내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던 도마도 생각난다. 아니 변절자 유다도 있다. 이 또한 주님의 길을 따르는 길일 것인가? 왠지 모를 웃음이 번진다.

밖으로 나온다. 거기 짜디짠 바다 물에 절여 쇠뭉치보다 더 단단한 나무토막이 손잡이로 붙어 있다. 해양쓰레기의 부유물이 성전의 손잡이로 쓰임 받고 있다. 극적인 생환이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일 것인가? 또 다시 눈물이 한웅큼이다. 한참이나 손잡이를 쓰다듬어 본다. 나도 누군가의 손잡이가 될 수 있을까?

불과 4~5평 밖에 안 되는 작은 공간에 이 엄청난 것들이 들어 있다니.... 가장 허름하면서 가장 값비싼,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큰,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가장 가치로운 미니멀 처치(minimal Church)였다.

나는 울음으로 웃었고 교회는 웃음으로 나를 울어 주었다.

캔버스에 유화, 44.5×39cm,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영국의 왕세손비 게이트 미들턴이 진주 귀걸이를 한 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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