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6-04-07 09: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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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왕과 사는 남자>, 엄홍도가 목숨을 걸고 강으로 들어간다. 이홍위의 시신을 수습한다. 차가운 물속에서 시신을 안아 들고 말한다.
“차갑지요? 갑시다. 따뜻한 데로 갑시다.”
그 짧은 한마디는 보는 이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객석 곳곳에 흐느끼는 소리가 번진다. 관객은 어느새 남겨진 사람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살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상실 앞에 선다. 관계가 무너지고, 꿈을 포기하고, 자존감이 짓밟히는 시간을 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상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상실을 통과하며 살아간다.
프로이트는 상실을 대하는 인간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우울과 애도다. 애도는 슬픔을 충분히 느끼며 조금씩 삶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우울은 상실을 부정하거나 감정을 억누를 때 깊어진다. 밖으로 흘러 나오지 못한 슬픔은 내면에 고여 곪는다. 마침내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바뀐다.
오늘날 장례 문화는 애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은 상실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깊이 느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유족은 조문객을 맞고, 식사를 챙기고, 절차를 처리하느라 분주하다. 정작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나 슬픔은 표현되지 못한 채 급히 봉합되고 만다.
그래서 장례가 끝난 뒤에도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적지 않은 재정 부담만이 아니다. 미처 울지 못한 감정, 다 건너지 못한 상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의 숙제가 오래 남는다. 사회는 빨리 추스르라고 말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민다. 그러나 슬픔에는 서둘러 닫을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 한구석에 머물며 오래도록 삶을 무겁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장례는 단순한 효율이 아니다. 떠난 이를 기억하며, 남겨진 사람이 정직하게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장례는 시신을 처리하는 절차가 아니라 상실을 견디게 하는 과정이다. 그 시간을 회복할 때, 죽음은 단지 끝으로만 남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비로소 치유의 시작이 된다.

그때 장례는 회복의 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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